시터 동인 제5집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너와 나, 우리가 안고 사는 우울. 그리고 그 감정이 가져온 마음의 병 우울증. 화제의 채널



이 책에 대하여



{시터} 동인지 제5집에는 한이나, 황상순, 노혜봉, 신명옥, 신원철, 이명, 정영숙, 최금녀, 최도선이 아홉 색깔, 아홉 향기로 모여 시의 터를 만들었다. ‘시터’ 동인들은 장인의 솜씨를 기본으로 삼으려는 신뢰할 만한 시 창작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적 대상과의 끈끈한 겨룸을 언어적 세공의 결실로 드러내려는 진지한 노력이 보인다.



명당明堂, 좋은 자리

‘터’라는 말은 참 좋다. 정겹다.

‘터’라 하면 사전적으로는 궁궐터, 절터, 우물터 등 건물이나 구조물이 들어서야 하는 맞춤한 자리(땅) 또는 어떤 일을 이루는 밑바탕이나 그 근간을 일컫는 말인데 써놓고 봐도 소리를 내어 읽어봐도 참 정감이 가는 마음 든든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동인’이라는 말은 더더욱 좋다. ‘이모’, ‘삼촌’같이 따스함이 느껴지는 말이다.

좋지 않은 일을 작당하거나 모종의 이익을 좇아 이합집산을 일삼는 ‘패거리’나 ‘조직’과는 근본부터가 확연히 구분되는 말이다. 두목이 있고 중간 간부나 졸개가 있는 모임이 아니다.



‘시터’ - 시의 밑바탕, 시의 고향, 시의 근간, 시가 편안히 머무는 곳, 시가 있을, 있어야 할 맞춤하고 좋은 자리(땅)! 우리 동인의 모임을 ‘시터’로 처음 제안하신 분은 정영숙 선생님인 것 같은데 머리가 아둔하여 뚜렷한 기억은 없다. 다만, 시터 구성원 모두가 너무 괜찮은 명품 이름이라며 한마음으로 맞아들인 것만은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 시터 동인 중에는 많은 시집을 내고 화려한 수상 경력은 물론 시단의 중요한 위치와 높은 평가를 받고 계신 분도 많지만 등단연도, 등단지, 나이, 시단의 위치 등 ‘계급장 다 떼고’ 어느 날 서로 의기투합하여 최금녀 회장님을 중심으로 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이 ‘시터 동인’의 시발점이다. 그저 시가 좋아서, 시 쓰기가 평생의 업인 줄 착각하는 나 같은 얼뜨기 시인으로서는 이만저만한 특혜이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시터에 둥지를 튼 열 명 시인이 다섯 번째 동인 시집을 낸다. 시집 제목은 한결같이 ‘시터’이다.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2016년 한 해 잠시 숨을 고르고 매년 한 권씩 시집을 발간한다. 발표를 하지 않은 신작시로만 동인지에 싣는 것은 사실 한계가 있다. 문예지가 흔치 않은 시절에는 동인지 형식을 빌려 신작을 발표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기왕 시집으로 엮었거나 이런저런 문예지에 발표한 시 중 세간의 높은 호평을 받은 시와 본인이 특히 아끼는 시를 자선하고 여기에 신작시를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고 좁은 땅에서도 배산임수니 금계포란형이니 생사출림형이니 하는 ‘터’ 좋은 명당이 어찌 없겠냐만 ‘시터’만큼 양광 좋고 훌륭한 길지는 단연코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면에서 동인 중 말석의 위치에 있지만 누울 곳을 미리 마련해 놓은 노인장처럼 자다가도 웃음이 나오고 먹지 않아도 터억 배가 부르다는 것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오대산 적멸보궁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옛날, 근처에 사는 어느 농부가 몰래 자기 부친을 여기에 장사지내고 다음 날 다시 올라보니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있더라는 얘기가 있다. 거기에 묻힐만한 합당한 인물이 되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은 오고가도 땅은 영원하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그곳에 거할 주인공이 우선 잘나야 한다. 빈 집이어도 까마귀는 까치집을 차지하지 못한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아니, 십년 이십년 후에도 시터, 분에 넘치는 명당에 엉덩이를 디밀고 앉아있기 위해서는 오늘도 나 자신을 부단히 채찍질해 나가야 하리라. 시터여, 영원하라!

---2020년 가을 시터 동인 일동



마지막 담판을 던진 승부수였을 것이다



있는 힘껏 물살을 차고 솟아오른



딱 한 번의 발버둥이



허공이라니



허공의 구름이라니



청초호 제방 위에 내동댕이쳐진 슬픈 아가미



볕살에 바짝바짝 목타다가, 소신공양



적멸에 이르는 먼 길



어머니 물고기의 한 생,



다음 세상으로 훌쩍 건너간 높이뛰기였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시라 물속에 가만 넣어 드렸다.

----[높이 뛰기] 전문



친구는 죽고 싶다고 한다. 남편과의 불화, 동생과의 갈등…… 들어보면 그 말이 그 말인데 그게 통한다. 불화가 통한다. 갈등이 통한다.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에서도 친구는 꼭 죽는다. 불화는 어디서든 통한다. 갈등은 어디서든 통한다. 통하지 않는 건 죽음뿐이다. 말이 씨가 되니 다시는 그런 말 마. 친구에게 당부하고 종일 친구의 전화를 기다린다.



친구가 입원했다. 병문안을 간다. 수술이 잘되어 정신도 말짱하다. 과일을 깎아 건넨다. 가스가 나오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위험하단다. 나를 가르친다. 통하는 게 많았다.

----최금녀의 [통하는 법] 전문



서울역 뒤

중림로 오르는 길 구멍가게 앞 인도에

어디서 흘러왔나

축 늘어진 껍질이 수도승 누더기 같은데



정신을 내려놓고

육체를 버리고 노숙하며

벽에 기대 있는 깡마른 꼬챙이 하나

나를 후려치고 있다

---이명, [죽비] 전문



저자 소개



저자 : 한이나 1994년 《현대시학》으로 활동 시작. 시집 『첩첩단풍 속』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귀여리 시집』 등. 한국시문학상, 서울문예상 대상 수상. 저자 : 황상순 1999년 《시문학》 등단. 시집 『어름치 사랑』 『사과벌레의 여행』 『농담』.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인정신 작가상 수상.



저자 : 노혜봉

저자 노혜봉은 1990년 《문학정신》 등단. 시집 『산화가』 『쇠귀, 저 깊은 골짝』 『봄빛 절벽』 등. 성균문학상, 시인들이뽑는시인상, 류주현향토문학상 수상.

저자 노혜봉은 1990년 《문학정신》 등단. 시집 『산화가』 『쇠귀, 저 깊은 골짝』 『봄빛 절벽』 등. 성균문학상, 시인들이뽑는시인상, 류주현향토문학상 수상.



저자 : 이명

저자 이명은 2010년 《문학과창작》,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등. 목포문학상, 숲속의시인상 수상.

저자 이명은 2010년 《문학과창작》,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등. 목포문학상, 숲속의시인상 수상.



저자 : 정영숙

저자 정영숙은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등단. 시집 『황금 서랍 읽는 법』 『하늘새』 『옹딘느의 집』 등. 부원문학상, 제4회 목포문학상 수상.

저자 정영숙은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로 등단. 시집 『황금 서랍 읽는 법』 『하늘새』 『옹딘느의 집』 등. 부원문학상, 제4회 목포문학상 수상.



저자 : 최금녀,

저자 : 최금녀 1962년 《자유문학》 소설, 1999년 《문예운동》 시 등단. 시집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등. 펜문학상, 현대시인상,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저자 : 신명옥

2006년 『현대시』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해저 스크린』 (세종우수도서 2017년)



저자 : 신원철2003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나무의 손끝』『노천탁자의 기억』『닥터 존슨』『동양하숙』 2014년『닥터 존슨』과 2019년『동양하숙』으로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저자 :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겨울 기억』 『서른아홉 나연 씨』. 문예진흥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