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이 주는 교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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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문화·예술
도보 여행이 주는 교휸
  • 출판사YBM
  • 잡지명내셔널지오그래픽 스페셜에디션 12 National Geographic Special Edition 12 vols.

도보로 하는 세계 여행을 통해 이 힘든 시기를 헤쳐 나아가는 동안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지구의 자원을 남용하지 말자.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공유하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를 기억하자.


약 24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현생인류가 태생지인 이 대륙을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해 세계를 정복하게 된 까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스토리텔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석기 시대에 아프리카를 떠나 널리 퍼져나간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거의 9년간 도보 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그 이유가 줄곧 궁금했다. 마침내 나는 동남아시아에 도착했다. 궁극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발걸음이 멈췄던 남아메리카의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나의 목표는 단순했다. 즉 나의 생각과 일,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커다란 비극을 맞이했다. 우리는 파멸적인 기후 위기와 광범위한 동식물의 멸종, 사람들의 강제 이주, 민중 봉기 그리고 치명적인 코로나바이러스를 경험했다. 나는 3000일 넘게 신발 끈을 조이며 파국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지구를 도보로 여행해왔다. 하지만 미얀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쿠데타와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양곤에 있는 격리자를 위한 호텔에서 깨어난 나는 서둘러 욕조에 녹물 같은 식수를 채웠다. 2월의 첫날이었다. 군복을 입은 살인자가 TV에 등장해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각료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곧 그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시위자들의 머리를 향해 발포를 시작할 터였다. 나중에 시인들은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체포되고 살해될 것이다. 어제 먹다 남은 밥을 버린 쓰레기통을 뒤졌다. 소형 냉장고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문을 막아둘까? 아니면 건물 아래에 있는 침입자들의 머리 위로 떨어뜨릴까?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흩어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들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이 고향인 사바나에서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전문가들은 ‘그린 아라비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긴 다리를 가진 우리 조상들이 지금보다 녹음이 더 우거졌던 중동 지역에 매료돼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조상들이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새롭게 노출된 해안을 따라 떠돌다가 아프리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난 이유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가설은 이전 세대의 기억을 이어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이런 과정이다. 

오랫동안 고대 인류는 멸종의 벼랑 끝을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고대의 땅에서 우리의 존재는 매우 희귀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새로운 도구를 발명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종족이 사멸하면 발명품도 사라졌다. 발전은 확산되지도, 대물림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암울하게 수천 년이 흘렀다. 발견과 손실, 재발명의 과정이 반복됐다. 우리의 발전된 생각을 유지하고 쌓아나갈 만큼 인구가 증가하고 안정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기억들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망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발전했다.

나는 해 뜨는 곳을 향해 장장 3만 9000km에 이르는 여정의 중반부를 향하고 있다. 당연히 나는 여행 중에 만났던 수천 명의 얼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 중에 과연 누가 이 불확실한 시대의 도전들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일까? 누가 온전한 상태로 이 세기를 끝마칠 수 있을까?

시위 진압이 유혈 사태로 번지면서 양곤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들을 삭제했다.

미얀마의 친구들, 즉 민주화 운동가들과 예술가들,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있는 학생들은 암호화된 앱을 이용했다. 군인들은 검문소에서 시민들의 휴대전화를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안전을 이유로 문자 메시지가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설정해 놓았고 온라인상의 대화가 영원히 사라지는 장면을 지켜봤다. 우리 엄마는 자신의 두 딸이 감옥에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탐웨에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있어… 무사하기를… 나는 제3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려고 시도하고 있어… 늦게 답해서 너무 미안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말이야.

내가 노르스름한 새벽 빛에 눈을 뜰 때마다 두려움과 분노, 위로가 담긴 이런 근심 어린 기록들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변혁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었다. 인류의 탄생 초기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자 폴 살로펙이 미얀마에 있는 동안 민주화 시위가 거세졌다. 지난 2월 군부가 정권을 잡은 후 수백 명의 시민이 살해됐고 수천 명이 구금되거나 고문을 당했다. 살로펙은 도보로 전 세계를 도는 ‘걸어서 에덴 밖으로’ 프로젝트의 일정을 중단하고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가야만 했다.
PANOS PICTURES/M.O.

카데르 야리의 발을 기억하라.

두툼한 굳은살이 박이고 넓적한 소고기 덩어리처럼 평평한 카데르 야리의 두 발이 진자 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쉼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에티오피아의 동아프리카 대지구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야리와 나는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낙타 두 마리에 짐을 싣고 아덴만을 향해 걸었다. 고무 샌들을 신은 야리는 스케이트를 타듯이 땅 위를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초인적인 효율성을 지녔다. 이는 먼 옛날 비를 찾아 끝없이 펼쳐진 땅을 거침없이 나아가며 대륙을 횡단한 우리 조상들의 발걸음이었다.

야리는 아파르족 출신의 유목민이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뚝뚝한 성격 탓이라고 착각했다. 유목민들은 가축 없이 한곳에 머물러 사는 모든 이들을 천하게 여긴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그는 걸으면서 물을 찾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타에게 무엇을 먹이죠?” 어느 날 풀이 별로 없는 곳에서 야영을 하게 됐을 때 야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한달 동안 그가 웃음을 보인 유일한 순간이었다. 

야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플러 레이더처럼 늘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는 구름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름은 수분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수분은 풀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근에 그의 터전은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았으며 나무의 가시는 하얗게 변했다. 비는 도통 내리지 않았고 물 웅덩이는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그의 부족과 소말리계에 속하는 이사족 사이에 자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평원이 가뭄으로 황폐해지자 이사족이 점차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존 전략이다. 유목민들은 두 발로 대재앙을 피해왔다. 내가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석기 시대 사람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쥐고 있는 염주처럼 집을 지니고 다녀라. 불필요하게 발을 움직이지 마라. 방향을 전환할 태세를 갖춰라.


21세기에 도보 여행을 하는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승자들은 기계에 앉아서 이동한다. 나머지는 자신의 골격을 사용해 움직인다. 다시 말해 이들은 두 발로 걷는다. 세계 여행을 하다 보면 후자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즉 그들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난민들, 추방자들, 이재민들, 실업자들, 노숙자들, 무국적자들. 그리고 유엔이 8000만 명은 족히 되는 것으로 집계한 강제 이주민들 말이다.

그들의 식사를 떠올려보자.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산악 지대에서 나는 시리아에서 온 아르메니아계 난민들이 살고 있는 허름한 아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스파섹!” 닫힌 문 너머로 여자들이 외쳤다. “잠깐만요!” 나는 그들이 오이와 소금, 치즈, 딱딱해진 호밀빵으로 황급히 식사 준비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내 앞에 접시 대용으로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연신 음식을 다시 채워놓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두 개의 여행 가방에는 그들의 세간이 전부 담겨 있었다.

술꾼들이 풍기는 냄새가 진동하는 지부티의 한 트럭 정류장에서 수줍어하던 소말리계 이주자들이 내게 튤립 모양의 잔에 따른 홍차를 연신 권했다. 이들은 아라비아로 건너가기 위해 밀수꾼들에게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다. 사용 가능한 여권을 소지한 백인 남성인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1500km 반경 이내에서 가장 큰 특권을 가진 여행자였다. 하지만 사막에서 갈증으로 사망한 동료들을 뒤로하고 떠났던 이들이 내가 그 집단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양 숟가락으로 설탕을 떠서 내게 건네줬다.

홈스에서 쫓겨난 시리아인들은 요르단에서 토마토를 수확해 먹으면서 생존했다. “고기가 없네요. 이곳에서 닭고기를 먹어보는 게 우리의 소원이에요.” 한 사람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 홈스는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지시한 포격 공격으로 초토화됐다. 몇몇 망명자들은 울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떤 가족은 할아버지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야생초를 먹었다는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토마토 스튜와 절인 토마토 등 갖고 있는 음식을 나눠줬다. 나는 며칠 밤을 그들이 건네준 담요를 덮고 잠을 잤다. 걸걸한 베두인족인 나의 도보 여행 동반자 하무디 알웨이자 알 베둘이 우리가 가진 모든 음식을 나눠줬다. 시리아인들이 베풀어준 환대에 가슴이 먹먹해진 우리는 그들과 헤어져 수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래투성이의 텐트에서 보낸 며칠은 내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시간이었다.
 

2014년에 살로펙은 요르단을 걸어서 여행했다. 당시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수십만 명의 난민 중 한 명이었던 모함마드(당시 11살)는 가족과 함께 요르단을 이리저리 떠돌며 과일이나 채소를 따는 일을 했다. 와디 럼의 구릉 지대에 머물던 한 시리아인 가족은 살로펙에게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고기가 없네요. 이곳에서 닭고기를 먹어보는 게 우리의 소원이에요.” 집 주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히바를 기억하라.

나는 유목민이 이용하는 카라칼파크스탄의 스텝 지대를 터벅터벅 걸어서 태양 아래 노란 사암이 아름답고 은은하게 빛나는 도시로 향했다.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꽃을 피우기 400여 년 전 오아시스의 도시 히바는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처럼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다. 즉 이곳은 자유분방한 사상과 과학, 예술, 기술, 언어의 집결지였다. 지중해로부터 유입된 그리스 철학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지적 성취의 번영기를 불러오는 데 기여했다. 펄프로 만든 종이, 단조한 강철, 초기의 고등 수학 같은 아시아의 발명품들이 대상 행렬에 실려 유럽으로 전파됐다. 실크로드는 구대륙에 발전된 문명을 전하는 창구였다.

“이 사막에서 생존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관개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학 기술이 필요하죠.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수학을 사용했어요.” 히바에 거주하는 건축가 가브하르 두르디에바가 설명했다.

두르디에바는 1000년 전에 연산법을 발명했거나 지구의 반경을 계산했던 실크로드의 천재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하지만 오늘날 히바는 음침한 도시다. 여러 대의 버스에서 내린 독일 관광객들이 이제는 방어할 대상을 잃어버린 채 우뚝 솟아 있는 석재 성벽 밑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

고대의 성벽은 실크로드의 주요한 특징이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옛 흉벽이나 보루 그리고 방어벽을 지나쳐왔다. 중세의 이러한 방어 시설들이 무장한 유목민이나 침입자들을 막아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보편적인 사실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다민족으로 이뤄진 부유한 교역 왕국들이 내부적인 문제로 쇠락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치와 종교의 양극화, 왕실 내부의 복잡한 갈등 관계, 종파의 극단주의, 불관용, 비이성적인 숙청 그리고 마침내 도래한 침체기 때문에 붕괴했다. 1200년대에 그들은 칭기즈칸에 의해 짓밟혔다.

성벽은 정책 실패의 기념물이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사로지 데비 야다브를 기억하라.

그녀는 밝은 자홍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오른발에는 가시에 찔려 생긴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녀는 인도 라자스탄주 자이푸르에서 동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의 한 농장에 살았다. 그녀의 밀밭은 하늘 아래 반짝거렸고 물소들이 열기를 식히는 검은 진흙탕도 보였다. 

“여기서는 우리가 일을 다해요. 불가피한 상황이죠. 남자들은 전부 도시로 일하러 갔어요.” 여성 일꾼들로만 이뤄진 작은 농장을 관리하는 엄격한 여장부 야다브가 말했다.

그녀에게 수확에 대해 물었다. 변덕스런 날씨에 대해서도 물었다. 야다브는 세계에서 최악의 물 위기를 겪고 있는 6억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수천 개의 사방 댐을 파서 한 방울의 빗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떤 이들은 수수처럼 수익성이 떨어지지만 가뭄 적응력이 뛰어난 옛 작물들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야생 지대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강을 따라가라는 격언이 있다. 물은 문명을 따라 흐른다. 나는 항상 이 조언을 명심했다. 그런데 그 문명이라는 것은 이런 모양새였다.

13살 때 강제로 결혼한 사로지 데비 야다브는 손녀들과 함께 밭을 경작했다. 이런 여성들이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 인력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야다브는 실제로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부재 중인 남편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남자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인도 펀자브주에 있는 24시간 가동되는 쌀 가공 공장에서 한 남자가 야간 작업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살충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이 지방의 지하수면이 오염됐고 암 발생률이 증가하고 있다. 

양곤에서 도보 여행을 중단하다.

군대가 수백 명의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내전 상황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은 너무 위험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나는 여행 원칙을 어기고 미얀마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나는 이 생애 혹은 다음 생애에서 미얀마 친구들을 그런 환경에 방치해두고 온 것에 대해 반드시 업보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몇몇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한 이웃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있는 민주화 운동가들이었다. 집 안은 대학교 기숙사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자전거들이 현관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구석에는 기타 하나가 벽에 세워져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탁자 주위에서 현대식 무기를 지닌 정부군에 대항하기 위해 대나무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오래된 익숙한 장면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화살촉은 6만 1000년 전의 것이다. 그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부두 동굴에서 발견됐다. 내가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고대의 호모 사피엔스가 틀림없이 그 화살촉을 발명했을 것이다.

“누구든 이 투쟁에서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 싸움에서 온전한 상태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은신처에서 문신을 지닌 한 비디오 제작자가 말했다.

이 말은 인류의 앞날을 위한 축복의 기도처럼 들렸다. 나는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항상 비를 쫓아 발걸음을 재촉하라고? 조금이라도 가진 것을 함께 나누라고? 나를 둘러싼 벽을 절대 믿지 말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을 빌었다. 탁자 위의 아이패드 옆에 화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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