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자기만의 서사다. 펼치는 것도 접는 것도 각자의 몫. 중요한 것은 필력이 아닌 활력이다. 예고 없이 던져진 삶을 오롯이 자기 서사로 완성해내려면 자신을 넘어서 타인과의 공명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인간 실존에 띄워진 희망의 부표는 ‘공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말하면서도 타인을 듣는 공감의 언어는 어떻게 구사하는 것일까. 공감과 성장, 나아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수렴되는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는 이에 대한 철학적 여정을 핍진성 있게 보여준다.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2016), 아시아권 최초 제17회 일본 서점대상(2020) 번역소설 부문 수상, 국내 누적 판매량 90만 부, 전 세계 20개국 출간에 빛나는 이 작품은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수작이다.

이처럼 수많은 독자에게 공감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아몬드>는 최근 동명의 뮤지컬로 각색되어 관객과 만났다. 연출가 김태형(44)의 손을 거친 이 작품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텍스트로 완성되었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모범생들><더 헬멧>, 뮤지컬 <마리퀴리><리지><팬레터> 등 수많은 작품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그는 결핍과 상처로 움푹 팬 내면의 공간을 무대라는 공간 위에 어떻게 구현했을까.

“보통은 뮤지컬만의 문법을 새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이번에는 원작을 최대한 살려서 가보자고 방향을 잡았어요. 소설을 상상하던 그림으로 옮겼을 때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을지를 우선으로 했죠.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가면서 윤재의 작은 변화들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고요.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감정을 터뜨리는 걸 허락하면서 더 큰 울림이 생겼고,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릴 수 있었죠.”

이 작품은 ‘아몬드’라 불리는 뇌 속 편도체가 작아서 감정을 못 느끼는 주인공 윤재의 성장담을 그렸다. 정서를 언어화하지 못하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을 앓고 있는 그가 어떻게 결핍과 갈등, 상처와 고통과 대면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지 전면으로 드러냈다. 특히 인간의 칠정(七情)인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미장센으로 살려낸 장면은 그가 속한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엄마와 할머니)의 관계성과 사랑을 따듯하게 시각화했다.

“기본적으로 성장 드라마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감정만 있으면 되는가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어쩌면 공감 능력도 학습되는 거라 누구나 배워야 하죠. 감정을 못 느끼는 윤재도 그랬듯이 말이에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양육자의 헌신과 노력이 절대적이죠.”

소설에는 행간과 지면에 독자의 심리적 공간이 마련되고, 무대라는 물리적 공간에는 관객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또 다른 내적 공간이 자리한다. 이 작품에서는 텅 빈 표정으로 독백하고 대사를 읊는 윤재가 무대 위에 남겨둔 감정의 여백을 관객이 채워나가야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관객이 주체가 되어 증폭된 감정을, 감동의 진폭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배우가 울 권리를 획득할 때까지 울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슬픈 상황이나 연기가 쌓여갔을 때 배우가 먼저 느끼고 울어버리면 관객들은 슬픔을 느낄 틈이 없죠. 결국 관객을 충분히 설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마치 둑이 서서히 무너지듯이.”

감정의 과잉과 감정의 결핍, 외부에 대한 민감한 감각과 무감각, 온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와 온전한 사랑을 받은 아이. 서로 다른 이유로 ‘괴물’이라 불리는 두 소년 윤재와 곤이는 대척점에 서있지만 다른 듯 서로 닮아있다. 공감의 자장 안에 머무는 개인적·사회적 의미의 스펙트럼은 두 인물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지점에서 확장된다. 현시대의 알레고리로서.

“이 작품은 SF소설과 다를 바 없어요. (피조물은) 인간과 비슷한 존재인데, 작가마다 다루는 특징만 다르죠.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유기체적 특성이 있고 말을 하면 다 인간인가, 생각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가, 시대마다 고민하죠. 극중 끔찍한 사건 현장에서 사람들은 감정이 있는데 왜 행동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나와 뭐가 다른가. 감정과 공감에 대해 질문하게 되죠. 근원적으로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공감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해요. 그 믿음이 곧 상식이고 도덕이며 인간의 본능이죠.”

우리는 쉽게 서로를 타자화한다. 다름을 틀림의 근거로 삼으며. 이러한 현실의 그늘을 들여다보며 소수자, 약자, 여성에 대한 주제에 천착해온 그는 과감히 버려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의 경계에서 창작적 고민을 해왔다. 시대정신을 견지하며 의미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남들보다 조금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연출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처음 연출을 시작할 때는 개인과 사회와의 충돌, 사회 시스템에 억압된 개인, 이를 싸워서 이기는 사람과 무너지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했어요. 시스템에 함몰되지 말자는 신념도 있었죠. 제 주변에는 재능 있는 여성 동료들이 정말 많은데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들을 위한 공연을 해보자, 함께 싸우고 연대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죠. 손을 내밀어 주는 것, 어디에나 필요하잖아요.”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과학고를 거쳐 카이스트에 입학한 뒤 한예종을 졸업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인생의 방향을 틀고 새롭게 이야기꾼을 꿈꾼 그가 선택한 방법론은 ‘연출’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예술의 이유가 있듯이 그의 내적 에너지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수학, 과학, 물리에 재능이 있다고 믿었지만 공부를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었어요. 다행히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그때 드라마 문법, 서스펜스 등을 감각적으로 익힌 것 같아요. 계속 찾아서 읽다 보니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저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상업 예술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 작품의 생명력과 함께 흥행도 너무 중요해요. 직업인으로서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대중의 기호를 무시할 순 없죠. 물론 사회적 함의를 담은 작품을 더 사랑하고 잘하게 되긴 하더라고요(웃음). 앞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확보한 작품을 해야죠.”

인터뷰의 문을 닫으며 문득, 심 박사가 윤재에게 들려준 말이 마음결을 스친다. “(…)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관계는 공감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목적이 아닌 의미로 존재한다.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면 목적만 앙상하게 남는다는 윤재의 대사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삶은 자기 서사에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자신만의 문장을 쓸 시간이다.

글. 사진 김신영 편집장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22,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