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반세기를 넘어서

나태주, 시인

만남 자체가 인생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온갖 것들과 만나고 하루하루 삶을 열어간다. 만남의 대상에는 사람, 사물, 사건, 자연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만남은 사람과의 만남이 아닌가 싶다.   

우선 부모와 가족, 또래와 친구, 이웃, 직장 동료, 심지어는 미지의 누군가와의 만남이 나의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가늘고도 길게 이어온 나의 인생. 그 가운데 누구와의 만남이 나에게 가장 의미 있고 좋았을까. 가만히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보면 아주 다양한 만남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만난 어린 독자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오래 글을 써온 입장이라 이런저런 독자들을 만나 왔다. 그들 중에서도 ‘원이’는 참으로 특별한 독자이자 선한 영향력을 전해준 독자이다. 나이로 쳐도 나와는 50년 차이. 조손간이라고 보면 맞을 인간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이와 나는 소통이 잘 된다. 무엇보다도 감정의 소통이. 느낌이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하고 취향이 비슷해서이다. 아주 어린 사람인데도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순간순간 깨닫게 해주고 또 각성하게도 해준다. 거꾸로 그는 나의 스승이고 인생의 안내자이기도 하다. 

원이가 나에게 온 것은 그다지 먼 날이 아니다. 그러니까 2019년 1월, 쨍하고도 춥던 어느 날. 한 젊은 여성 독자가 풀꽃문학관을 찾아왔다. 20대 초반의 아주 앳되고도 어여쁜 처자였다. 서울에서 왔고 대학을 갓 졸업했으며 집은 부산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찾아오기 전에 미리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자기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사실 문학관을 찾는 독자는 많지만, 이렇게 조심스럽게 예의를 차리는 독자는 별로 많지 않다. 요즘 세대 치고서는 참 세심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지 싶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마음이 갔다. 부산의 집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렵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마음의 도움을 받았노라고 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인과 응원군을 만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날, 그 순간부터 원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냥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지음(知音)이 되었다. 50년 나이 차이가 별로 걸거침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원이는 내가 모르고 있는 젊은이들의 동향이나 추세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이것은 행운에 가까운 일. 새로운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쓰기는 내가 쓰고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시들이지만, 그 내용이나 정서는 오로지 원이의 것을 빌린 것들이었다. 그렇게 <너에게도 안녕이><네가 웃으니 세상이 웃고 지구도 웃겠다>, 두 권의 시집이 나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이와 나는 책 한 권을 함께 쓰기도 했다. 내가 쓴 시를 읽고 거기에 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형식으로 된 <당신이 오늘은 꽃이에요>라는 책이다. 이로 인해 몇 군데 문학 강연에 초청되기도 했다. 다름 아닌 원이가 묻고 내가 답하는 식으로 하는 문학 강연이었다. 

간혹 부산 쪽에 문학 강연 일정이 잡히면 언제고 원이는 마다하지 않고 나를 맞아 길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고, 부산역에서 기차를 탈 때까지 옆자리를 지켜주곤 했다. 이보다 더 좋은 이웃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해서 부산의 당감2동에 세워진 나의 첫 번째 시비를 만나기도 했다. 이는 2007년, 내가 죽을병에 걸려 대전의 한 대학병원 1인실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동사무소의 공무원들이 찾아와 시비 건립 허락을 받아가지고 가서 세운 시비다. 그 뒤로는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는데, 12년 만에 처음으로 원이의 안내로 만나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 관한 정보나 영문학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기면 원이에게 묻곤 한다. 지난번 BTS의 가사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집필할 때도 그랬다. 가사 내용 가운데 영문으로 된 내용을 원이가 번역해 주어서 무사히 그 책을 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원이가 선생인 셈이다. 이렇게 내가 젊은 친구 한 사람을 만나고 그와 더불어 숨 쉬며 살아가는 나의 인생에 대해 나는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지금도 저 남녘의 큰 도시 부산에 원이가 살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내 마음은 금세 밝아지고 완연한 봄이 다가오는 듯하다. 참 소중한 만남이다.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학교, 충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시집으로는 <대숲 아래서><풀꽃><꽃을 보듯 너를 본다> 등 다수, <꽃을 던지다><봄이다, 살아보자> 등 다수의 산문집. 제26회 정지용문학상(2014), 제30회 소월시문학상 대상(2019), 제31회 김달진문학상(2020)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