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있다. 닿을 듯 가깝게.

작업실 한편에 매일 있다.

그런데 시들었다.

피었는데 내 속에서만 시들어 사라졌다.

현상은 가끔 인과율을 비껴간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이

얻을 수 없을지라도

내 부실함을 원망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만들고, 가마를 켜고, 기다린다.

나는 꽃처럼 나비를 기다린다.

현상에 없는 꽃을 마음에 피운다.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도록.

몇 해 전 경남 사천에 계신 스승 정동주 선생님께 편지를 받았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두 손으로 보듬어 안는 찻그릇’이라는 의미를 지닌 ‘보듬이’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굽이 없이 바닥 면은 평평하고 달항아리처럼 둥글고 포근한 형태의 보듬이는 내 작업의 전환점이 되었다. 

“흙을 만지면서 여러 꿈을 꾸고, 그릇에 꽃을 피워라. 차 마시는 때, 차의 향인지 네가 새겨 넣은 꽃의 향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아라.” 

선생님의 편지는 그릇에 꽃을 새겨 넣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면서 생각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던 내게 꼭 맞는 숙제를 내 주신 듯했다.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살아있는 자연물을 그릇에 표현하는 일은 단순히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물로 받았던 차나무의 차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남겨두었던 기억, 사천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텃밭에서 발견한 흰민들레꽃, 겨울이 되면 찾아오는 흰겹동백, 나의 경험과 시선으로 함께 호흡하며 바라본 꽃을 떠올리며 희고 푸른 표면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꽃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형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에 부조 기법의 하나인 돋을새김 기법을 연구하며 응용했다. 

백자의 ‘백(白)’에는 희고 밝다는 의미로 우리 고유의 심성과 정성이 담겨 있다. 백자가 지닌 숨은 밝음을 찾기 위해 흙을 직접 수비하고, 유약을 실험하면서 여러 밝은 빛깔을 찾아가고 있다. 이 과정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사용자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되고 또 다른 꽃으로 피어난다. 서로의 생각과 다른 시선을 자유롭게 공유하며, 서로가 상상한 꽃으로 백면(白面)을 채워가는 과정을 기대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형태가 없는 흙을 만질 때, 형태를 생각하며 그 속에 함몰되지 않고 내 생각과 주변의 이치를 따르고자 한다. 그 끝에, 손끝에 겨우 형태가 있을 뿐이다. 내 손끝을 거쳐 나온 것들이 사물과 어우러질 때, 낮과 밤, 그리고 빛과 어둠 어디에 놓이더라도 함께 포개져 형태가 없는 세계로 돌아가면 좋겠다. 진정 필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마음이다. 형태를 따르는 그릇이 아니라, 마음을 따르는 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