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페르소나는 공간화된 시간의 총합으로 구축된다. 이는 내적 공간에서 외적 공간으로 나아가며 연기적 실제는 예술적 실재가 된다. 극 안에서 인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배우 전미도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을 구성하며 연기적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2006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한 뒤 2008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대한민국 연극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그녀는 4년 후 뮤지컬 <닥터 지바고>로 대극장 무대에도 진출한다. 소극장과 대극장을 넘나들며 연극·뮤지컬 두 분야에서 ‘관객이 뽑은 올해의 배우’로 선정된 유일한 배우인 그녀는 연극 <메피스토>,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등을 통해 끊임없는 연기 변신을 꾀했다. 그뿐만 아니라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JTBC <서른, 아홉>에 출연하며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배우로서 외연과 내연을 확장하며 변화와 성장을 계속해온 그녀가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제1회 한국뮤지컬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스위니토드>의 ‘러빗부인’으로 돌아온 것. 6년의 시간,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생겼을까. 다시 무대 위의 삶을 살게 된 그녀를 서울 모처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나보았다.

“2016년에 처음 섭외가 들어왔을 때는 할 수 없는 역할이라 생각해서 몇 번을 고사했어요. 그런데 작품 영상을 찾아보다가 다른 배우들이 소화하는 모습을 보니 이 인물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구나, 해 볼 만하겠다 싶었죠. 막상 해보니 즐거운 작업이었고, 이번에도 이 역할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체력적으로는 더 힘들긴 한데, 6년 동안 겪어온 시간이 있어서 인물을 깊게 이해하는 지점이 생겼죠.”

<스위니토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곡·작사한 수작이다. 산업화의 명암이 짙게 드리워진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극중 인물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직면하며 극적인 서사에 매몰된다. 현실과 허구의 길항관계 속에서 미추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도덕과 윤리의 테두리는 희미해진다. 그렇다면 이 그로테스크한 블랙 코미디는 현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암흑기잖아요. 현재 더 잘살게 됐지만 지금도 먹고사는 문제로 힘들죠. 그 시대와 같진 않아도 윤리와 도덕성은 여전히 무너지고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상상할 수 없이 혐오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보면요. 이 극은 그런 것들을 꼬집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인간의 잘못된 욕망, 탐욕, 이기심, 어리석음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잖아요. 결국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다(웃음).”

작품의 톤 앤 매너, 주제의식, 당대의 시대성은 혁신적인 음악으로 모두 수렴된다. 어긋난 듯 완벽히 들어맞는 무정형의 정형성, 철저히 계산된 음악의 메커니즘은 마치 부조리극을 보듯 낯설지만 독창적이다. 이 난해하고 역설적인 음악 언어를 그녀는 어떻게 읽어내고 있을까.

“제가 ‘음알못’이거든요(웃음). 저는 연극배우라 생각하며 뮤지컬을 하고 있는데, 음악을 잘 몰라도 참 잘 써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이 저라는 배우에게 장점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는 러빗의 넘버들이 아리아가 아닌 대사의 연장선이라는 거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말하는 것처럼 노래 안에서 스토리텔링하려고 해요. 그렇게 작곡된 곡들이라고 계속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첫 번째 곡은 노래라고 하기에는 그렇잖아요. 이 뮤지컬 참 특이하고 낯설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그만큼 매력을 느끼면 못 빠져나가죠.”

그녀는 탄탄한 연기력이라는 구심력과 특유의 자유분방함이라는 원심력으로 에너지를 몰입시킨다. 특히 체력 소모가 많은 러빗부인을 표현함에 있어서 물리적 한계는 분명 있지만 심리적 표층과 심층을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빚어내고 있다. 바로 거기에 연기적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는 묘하게 재미있어요. 거지 여인에게 화내다가 2층에서 애교 떨며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에 연기적 쾌감이 있죠. 정말 미친 여자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러빗이 악역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인육 파이를 만드는 신은 커버할 순 없지만 먹고사는 문제로 자신이 이익을 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윤리 의식조차 없어진 인물이라고 봐요. 어쩌면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내보이진 않아도 사실 곳곳에 있죠.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있잖아요. 이를 이해시킬 만큼 양쪽을 오가며 보여주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녀는 핍진성을 획득하기 위해 인물의 행위의 동기를 먼저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내적 투쟁과 화해를 수없이 반복하며. 여기서 적절한 유머 코드는 인물의 경계성과 양면성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도구로 작동하며, 관객과 배우 사이의 에너지는 생산적으로 교환된다.

“이 공연은 관객과의 케미가 특히 중요해요. 여성 캐릭터가 관객을 이끌며 웃기는 역이 거의 없는데, 그런 포인트가 많아서 더 재미있죠. 반면에 속지 말아야겠다 싶어요. 마냥 웃기는 공연만은 아니다 보니 경계하려고요. 사람이 좋은 걸 갖게 되면 더 갖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처럼 더 웃기고 싶고 그렇잖아요. 절제해야죠(웃음). 웃기다고 마냥 좋은 건 아니니까요.”

빛에는 색이 존재하듯 배우에게도 고유의 색이 있다. 모든 색의 빛을 반사하는 흰색을 닮은 그녀는 자유로운 필치로 흰 도화지 위에 다채로운 삶을 그려낸다. 그 무한한 공간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극중 인물로 완벽히 치환되는 것. 하지만 어느덧 데뷔 18년 차가 된 그녀에게 있어서 연기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주로 어려 보이는 역할만 들어왔고, 제게 한계를 그으셨죠. 그래서 치기 어린 마음에 도전한 선택도 많은데, 나중에는 제가 가진 것들이 오히려 장점이 되더라고요. 기대하지 않아서, 다른 모습이 나오면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느 시기까지는 도전 의식으로 작품을 선정했죠.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다양하게 저를 선택하실 수 있으니까요. 배우는 어쩔 수 없이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녀는 올해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늦지 않게 신작 연극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처음’과 ‘새로움’, 이는 그녀에게 내재한 갈망이자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순수한 연기적 열망이다. 무대라는 무한대에서. 인터뷰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문득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뿌리내렸지만, 흘러간다(I am rooted, but I flow).” 그녀도 그렇게 굳은 심지로 유연하게 흘러가길. 단단한 뿌리의 나무에서 자유롭게 흩날리는 가지처럼.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글. 김신영 편집장

사진. 오디컴퍼니(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