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동네 친구들이 모두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와서 열심히 건반을 두드렸지만, 정작 나는 바닥에 엎드려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특히 자라면서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붓글씨며 재봉틀 심지어 요리까지 자연스레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이후 공예과에 진학해 금속과 나무를 다루었고, 대학교 3학년 때는 유리에 관한 물질적 호기심이 생겨 공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비록 왕복 3시간이 걸렸지만 매주 한두 번씩 오가며 유리가 지닌 재료적인 특성에 매료되었는데, 다양한 색상의 유리 막대가 불 속에서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광경을 보며 말 그대로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유리의 다양한 제작 기법을 비롯해 작가로서 어떻게 조형 예술로 표현할지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1,200도가 넘는 뜨거운 상태의 유리를 맨손으로 만질 순 없어서 다양한 도구로 형태를 변형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즉각 표현하기 때문에 긴 시간 숙련이 필요하다. 또한 차가운 상태의 단단한 유리를 변형할 때도 여러 기자재를 사용하기에 그 기술에도 경험이 필요하다. 제작을 위한 시설도 많이 필요해서 유리를 전공하고 졸업을 하고도 공방을 차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대학원을 졸업했던 2008년에는 공예품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던 중 당시 남동생이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어서 무작정 편도 비행기표만 사서 떠났다. 운 좋게도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드니에 있는 유리 전문 갤러리를 소개받고 호주 신진 작가 단체 전시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시 후에는 갤러리숍에서 상설 판매도 하게 되면서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호주 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은 아니었지만 캔버라에 있는 Glassworks Center의 스튜디오 렌탈 시스템을 활용해 작업하고, 멜버른의 Kirra Gallery에서 호주 작가들과 함께 전시도 했다. 이는 그곳 작가들이 어떻게 작업하며 살아가는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물론 2년간의 호주 생활 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공방을 차리기에는 힘든 현실이었다. 결국 취업을 선택하고 몇 년간 세상과 타협도 해봤지만, 작업에 대한 갈망 끝에 작가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을 나만의 유리 작업으로 쌓아왔다.

2014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하게 된 작업이 ‘Re:bottle’ 프로젝트이다. 논문 작업이기도 한 하이힐 형태와 호주에서 만든 ‘꽃신’ 작업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시대를 바라보며 스스로 느끼는 내면의 이야기에 심리학적으로 접근했다면, ‘Re:bottle’ 시리즈들은 현시대를 바라보며 작가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둔 작업이다.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들면서 소속에 따라 역할이 바뀌게 되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 삶을 이어나가는 방식에서 모든 존재가 지닌 쓰임에 대한 관점으로 연결 짓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안에 숨겨진 가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내 경우에는 일회성 기능으로 역할을 상실하는 유리병들에 관해 관심을 두고 지금까지 긴 시간 들여다본 것이다.

짐작건대 이러한 작업이 나오게 된 배경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엄마의 생활 속에서 사물을 재사용하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할머니의 찬장 속 가득했던 담금주 병들처럼 나도 각종 유리 용기를 수거해 세척하고 절단해 재가공한다. 거친 면을 부드럽게 다듬는 과정만 8단계 이상이 필요하지만, 레고 블록을 쌓듯 크기를 동일하게 맞춰 연결하면서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부여해 우리 곁에서 새로운 역할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으며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늘 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일상에서 흔히 지나쳐버릴 수 있는 사물을 보고 그 안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해 그것의 쓰임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형태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인간관계의 형상을 연결 짓게 되었다. 나아가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연과의 순환으로 되돌아간다는 순리를 깨달았다. 작가의 생각과 손안에서 빛을 담아 세상을 밝히는 가치를 담고 싶었고, 자연의 형상을 닮은 오브제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 이야기는 이어가고 싶다.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때로는 고단하지만, 문득 지나온 순간을 뒤돌아보면 밝게 빛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테니.